노미례님은 일제강점기 1938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이했고 “도시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아버지 손을 잡고 인천으로 이사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동생들과 함께 다복하게 지내던 인천
생활은 6.25 전쟁으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끝났다. 14살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험난한 피란길을 나섰다.
고향에서 일가친척에 의탁하며 지내다가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광주로 올라왔다. 함께 온 친구들과 함께 여러 번 도전한 끝에 방직공장에 입사하였다. 홀어머니와 어린 세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일에만 매진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공장에서 취미도 낭만도 챙길 겨를도 없이 뛰었다. 그 덕분에, 순식간에 조장이 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방직공장에서 일했고 급여는 모두 친정으로 보냈다. ‘동생들이 독립하기 전까지 일을 계속하겠다.’는 결혼 조건 덕분인지 시댁에서는 탐탁해하지 않았으나 방해하지 않았다. 공장을 다니며 두 아이를 낳았고, 퇴직한 후 다시 임시직으로 공장에 다니며 셋째를 낳았다. 막내 넷째만 일에서 벗어나 출산하였다.
학교 대신 산업현장에서 인생의 참 의미와 삶의 지혜를 배웠고, 몸으로 경험하고 터득한 인생 공부와 마음공부가 참 스승이었다. 젊은 시절 고생스러웠던 방직공장 생활 시절이 슬프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오히려 삶의 터전이자 가족을 먹여 살린 젖줄이었던 방직공장 추억은 훈장이다. “나는 배운 것이 없어 아는 게 없다.”는 나직한 말에는 치열했던 어린 여성 노동자의 삶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가족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녹아있다.
구술채록 김태희・한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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