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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순이라고 놀림 받아도 가족을 위해 자존감도 버리고 여자라는 것도 버리고"
김복자님의 백터 이미지

김복자는 광주광역시 동구 산수동 꼬두메마을에서 태어나 양동 발산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발산마을은 광주에서도 가난한 동네에 속했으며 양동 천변에 설치된 뽕뽕다리를 건너 일신방직, 전남방직으로 일하러 가는 공장 노동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김복자가 태어난 뒤로 아버지 일이 잘 풀려서 “우리 복자는 복덩이”라며 아버지께서 매우 예뻐하셨다. 동네에서 유일한 기와집에 살았지만 가정형편이 날로 어려워져 동신여고 3학년 2학기 때 자퇴하였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아이스크림 공장, 어망 공장, 인천의 아남전자 부품공장 등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 일신방직 공장에 우여곡절 끝에 입사하였다. 입사 후에는 15~20kg 솜뭉치를 동그랗게 말아 기계에 넣어주는 작업을 했다. 큰 고무통에 솜뭉치를 싣고 다니는 일은 체력소모가 엄청난데다 솜먼지가 날리는 환경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노동을 해서 받은 월급이 가족들의 생계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어렵고 힘든 일도 참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공장일을 하면서 오빠 친구의 권유로 가톨릭청년노동자회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 모임과 가톨릭 입교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관 형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장에서도 동료들에게 가톨릭청년노동자회의 가치를 나누고자 노력하였다. 방직공장 퇴사 후 가톨릭청년노동자회 간사로 일하던 중 5.18 민주화운동을 맞았다. 가톨릭청년노동자회 회원들은 광주에서 일어난 비참하고 비극적인 진실을 전국에 알리고자 노력했으며 함께 봉사했던 동료의 어이없는 죽음도 겪었다.
스물일곱, 늦은 나이에 결혼하면서 간사직을 그만두었고 1남 1녀를 낳았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가르침과 가톨릭 신앙의 영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구술채록 조경미・채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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